문학/순수문학

「관객모독」- 페터 한트케

omicron2000 2022. 3. 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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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여, 이 즐거운 모독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관객모독

전통적 연극의 형식과 관습을 거부한 문제작!치열한 언어 실험을 통해 글쓰기의 새로운 영역을 연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페터 한트케의 초기 희곡 『관객모독』. 새롭고 독창적인 문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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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에는 제4의 벽이라는 개념이 있다. 연극에서 인물이 감옥 안에 갇힌 상황을 생각해 보자. 무대의 양옆과 뒤는 벽으로 막혀 있는데, 관객을 향한 방향으로는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인물이 갇혔다는 점을 확실히 하려면 관객 방향으로도 벽을 세워서 인물을 완전히 가두어야 하지만, 관객들이 배우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어야 하니 벽이 '없지만 있는 척'을 한다. 관객들이 다 보고 들을 수 있음에도 배우는 '혼자 있는 척'을 하며, 한 쪽은 뚫려 있는 데도 '사방이 막힌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대의 양옆과 뒤를 막은 벽이 제1, 제2, 제3의 벽이라면 이 투명한 벽을 바로 제4의 벽이라고 한다. 현재는 창작물 내의 캐릭터가 자신이 특정 작품의 등장인물이라는 점을 자각할 때 제4의 벽을 넘거나 돌파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관객모독」은 처음부터 제4의 벽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취급하는, 대단히 실험적이고 독특한 연극이다.

 「관객모독」이 비튼 연극의 형식은 제4의 벽만이 아니다. 희곡에는 희곡의 3요소라는 것이 있다. 인물, 사건, 그리고 배경이다. 그리고 대본에는 해당 인물이 하는 대사, 해당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 등의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관객모독」에는 이마저도 전부 없다.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배우에게 내리는 지시사항이 없으며, 책을 읽어 보면 전부 난해한 문장으로 되어 있어 이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급기야 「관객모독」은 연극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사실마저 망각하는데, 연극을 보는 관객들을 더 이상 고객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존댓말을 쓰지만 점점 말이 짧아지다 막바지에는 관객들을 존중하기는커녕 파시스트라는 둥 돼지라는 둥 온갖 욕설을 입에 담으며 비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의 제목이 「관객모독」이다.

 하지만 과연 이 연극에서 관객은 모독당하고 불쾌하게 떠나야만 할까? 「관객모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큰 호응을 얻었고, 물이 끼얹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아 아직까지 공연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모독당하면 당연히 불쾌하다는 상식을 뒤집은 것이기도 하며, 이 연극에서 진정으로 모독된 것은 관객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말 모독당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 다름아닌 기존의 연극 체계다. 기성 문학에서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관객은 공연을 감상하고,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고, 대본은 배우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규칙이 절대적인 법처럼 군림했다면 「관객모독」은 그런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유쾌한 연극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과거의 연극을 모독했다.

 여기에서 배우는 인물을 연기하지 않는다. 배우는 그냥 무대 위에 선 사람이다. 관객은 공연을 관람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냥 의자에 앉은 사람이다. 사실 관객이 무대에 올라와도 되고, 배우가 의자에 앉아도 된다. 즉 이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은 그저 '연극을 즐기는 한 사람'이며,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관객모독」을 여러 번 읽은 배우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만, 아마 관객들은 기존의 연극을 보는 데 익숙해서 스스로를 참가자가 아닌 무대 밖 방관자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관객에게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고 말한다. 관객들에게 물을 뿌리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이상 관객들은 제4의 벽 너머에 있는 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며, 무대를 내려다보는 입장에서 배우의 옆으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이 연극은 모독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려다보는 연극보다 함께하는 연극이 더욱 즐겁기에, 관객들 또한 기꺼이 모독당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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