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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수학

「수학 귀신」-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by omicron2000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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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유로운 눈으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 수학이다

 

수학귀신

계산은 전자계산기가 다 해주는데 산수를 익힐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만 건전지가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수학귀신>은 수학을 싫어하는 한 아이가 열두날 밤마다 꿈에서 수학귀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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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는 수학이라면 질색을 하는 소년이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수학을 왜 배우는지도 관심이 없고, 그에게 수학 공부는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꿈속에서 수학 귀신(원문은 수학 악마) 테플로탁슬이 나타난다. 악마처럼 붉은 피부와 뿔을 가진 그는 로베르트에게 수학의 매력을 알려주기 위해 왔다고 하나, 당연히도 로베르트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베르트의 수학 선생인 보켈 박사가 수학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은 단순히 문제만 풀게 한 다음 자신은 꽈베기빵이나 먹었기 때문에 수학에 흥미를 가지려 해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로베르트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테플로탁슬은 마법으로 계산기나 커다란 숫자를 만들며 수학의 즐거움을 일깨워주고자 12일동안 로베르트의 꿈에 나타나 수학 개념을 하나씩 가르쳐 준다. 처음에는 냉소적으로 반응하던 로베르트도 점차 수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해 마침내 수학자들의 천국이자 지옥인 수학 낙원에 초대받기까지 한다. 그곳에서 수학자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에서 피타고라스의 별 모양 메달을 수여받은 로베르트는 잠에서 깨어나 수학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학교로 간다. 흔한 수포자였던 학생이 역사적 수학자들에게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대상 독자는 수학에 큰 관심이 없는 학생들, 딱 로베르트와 같은 학생들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이는 책의 분량에 비해 삽화도 많고 편하게 읽힌다. 다루는 수학적 지식 또한 마찬가지로, 전문적이거나 어려운 내용을 알려주기보다는 단순히 흥미를 끌기에 최적화된 소재를 가지고 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소수나 도형에서 규칙성을 찾는 부분은 왜 그런 규칙이 나오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신기한 규칙이 나온다는 것 하나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시로, 파스칼의 삼각형에서 짝수나 3의 배수 등 특정 숫자만 색칠해서 도형의 규칙을 보여 줄 때, 조합에 대한 수학적 지식이 있다면 그 규칙성의 원인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조합은커녕 기본적인 수학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원리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수학 교육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단지 흥미를 끄는 것 자체가 이해에 앞서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테플로탁슬이 흥미를 우선하는 이상적인 교육관을 지닌 것과 대조적으로, 최악의 교육관을 보여 주는 보켈 박사는 주입식 교육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학생들이 흥미가 있건 없건 학습지만 풀도록 하고 자신은 딴짓을 하는데, 교사로서 불성실한 모습일 뿐더러 이렇게 배운 학생이 수학을 잘 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로베르트의 악몽에 보켈 박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학생에게 트라우마까지 남긴 모양인데, 「수학 귀신」은 이런 무책임한 주입식 교육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날리고, 수학 교육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다만 「수학 귀신」의 의의가 단순히 수학에 대한 흥미를 끌어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책에 대한 과소평가일 뿐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쉬운 개념만으로 수학의 본질을 꿰뚫어본다는 점이 있다. 「수학 귀신」을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 가장 인상깊은 대목으로 꼽는 것이 바로 '쾅!'과 '깡총 뛰기'인데, 이것이 핵심이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테플로탁슬은 남들이 용어를 어떻게 부르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편한 대로 쓰면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교에서 자기만 알아듣는 표현을 쓴다면 혼이 날 테지만, 용어와 표현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느낌표 기호에서 착안해 팩토리얼(!)을 '쾅!'이라 부르고, 거듭제곱은 '깡총 뛰기'라고 부른다. 제곱근은 '뿌리 뽑기'라고 부르는데, 제곱근을 뜻하는 용어가 뿌리라는 뜻이기도 하기에 일종의 언어 유희인 셈이다. (영어로는 root, 한국어에서도 제곱근의 근은 뿌리 근根자라 자연스럽다.)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팩토리얼과 거듭제곱, 제곱근에 비해 쾅과 깡총 뛰기, 뿌리 뽑기는 휠씬 직관적인 표현으로, 테플로탁슬이 로베르트에게 이런 표현을 제안한 것도 수학에 대한 로베르트의 흥미를 끄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테플로탁슬이 용어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서 사용했는데도 수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숫자의 규칙성도, 도형의 법칙도 사람이 쓰는 말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본질이다.

 무한을 연구한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는 생전에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고 하였다. 어딘가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 진정한 수학 연구라는 뜻이다. 테플로탁슬의 제멋대로인 용어는 그 시작일 뿐이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보켈 박사가 했던 것과 같은 주입식 수학 교육은 수학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시키는 교육 방식인데, 이는 현재까지도 교육계에서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문제이다.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흥미가 갈수록 떨어져 수포자가 양성되고, 수학 성적이 떨어저 학습 범위가 줄어들기까지 했다. 20년도 더 전에 출판된 이 책이 지금도 적용되는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이 놀랍고도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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