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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순수문학

「악마」 - 레프 톨스토이

by omicron2000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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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성욕이라는 원죄

 
톨스토이 악마
-
저자
레프 톨스토이
출판
작가정신
출판일
2000.10.01

 아버지가 죽고 영지를 물려받은 예브게니는 젊고 건강하고 성실한, 다시 말해 흠 잡을 데 없는 남자였다. 귀족임에도 농장의 농민들과 큰 마찰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차용증이 없어 갚을 의무가 없었음에도 아버지의 개인적인 빚을 갚았다. 농장의 살림이 어려웠지만 경영 수완을 발휘해 경제적 여유를 갖출 정도로 능력도 좋았다. 이런 그도 한창 때의 남자였기에 여성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은 어쩔 수 없었는데, 혼자 고민하던 그는 산지기에게 정을 통할 여자를 부탁한다. 유부녀는 남편에게 들킬 위험도 있고 도의적으로 꺼려졌으나, 산지기는 남편이 멀리 출장을 가 있다는 스체파니다라는 여자를 추천한다. 예브게니와 스체파니다는 산지기의 중개로 수 차례 만나 육체적 관계를 가졌고, 이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의 불륜 행각이 소문으로 퍼진다. 그러다 예브게니가 결혼할 때가 되자, 그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사회적 평판을 회복하고자 스체파니다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며 예브게니에게는 행복한 나날이 시작되었으나, 리자의 유산 이후로 자꾸 스체파니다가 눈에 밟히게 된다. 스체파니다를 볼 때마다 유혹에 빠지던 그는 집사에게 부탁해 그녀를 멀리 떼어놓으려도 해 보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멈출 수 없어 괴로워했고, 아이가 태어나자 다시금 평온한 삶을 되찾았으나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예브게니는 스체파니다에 대한 욕정에 그녀를 악마라고 여기기까지 하며, 리자와 스체파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며 장롱에서 총을 집어든다.

 여기에서 특이하게도 결말이 둘로 갈라지는데, 첫 번째 결말에서 예브게니는 자신을 쏜다. 의사는 그가 정신병 증세를 앓았을 것이라 말하지만 가족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만일 그가 정신병력자였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정신병자이고, 정신병자들은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광기의 징후를 스스로에게서는 찾지 못한다며 끝을 맺는다. 두 번째 결말에서 예브게니는 스체파니다를 쏘고 형을 선고받는다. 차이는 그뿐이고, 이 결말에서도 의사는 정신병을 언급하며,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총을 꺼내든 시점에서 이미 정신병자였다는 셈이다. 성욕이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모두가 정신병자라는 뜻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악마」의 가장 큰 특징은 (세밀한 감정 묘사가 톨스토이 문학의 공통적 특징임을 감안하더라도) 예브게니의 내면 묘사가 놀랍도록 정교하며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톨스토이가 사실주의 문학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브게니가 톨스토이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도 그와 같이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었고, (예브게니보다 한참 이른 나이긴 하지만) 젊어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농민에게 친화적인 지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톨스토이 또한 혈기가 넘치고 성욕이 강해 불륜을 저지른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예브게니와 스체파니다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다. 도덕을 중요시하던 그에게 불륜은 부끄러운 기억이었을 것이고, 그 때문인지 그는 「악마」를 아내가 보지 못하도록 숨겨 놓았다가 사후에야 공개되었다고 한다. 즉 「악마」는 톨스토이가 죽을 때까지의 인생을 전부 담은 책인 셈이다.

 보이는 대로 해석하자면 이는 악마가 인간을 파멸로 이끌듯이 예브게니라는 한 건실한 청년이 육욕으로 파멸하는 과정을 다룬다. 후에 악마라 불리는 스체파니다와의 불륜은 젊은 날의 혈기로 끝나지 않고 결혼 후에도 그를 괴롭히는 족쇄가 되며, 기어이 그를 시체, 혹은 살인자로 만든다. 총을 집어든 시점에서 결말이 둘로 갈라지는 것은 톨스토이 본인이 아직 그 둘 중 어느 결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의사의 소견으로 미루어 「악마」의 주제는 성욕은 인간을 말 그대로 '미치게 한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체파니다의 행적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브게니는 그녀가 자신을 계속 따라다니며 유혹한다고 느꼈지만, 실제로 그들이 정을 통하던 장소에 갔을 때 그녀는 없었다. 즉 스체파니다가 예브게니와 자주 마주친 것은 단지 영주와 주민이 우연히 마주친 것일 뿐, 이미 정신병자였던 예브게니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예브게니는 무고한 스체파니다를 일방적으로 악마라 규정하고 총으로 쏘기까지 했다는 것이 되는데, 제목의 악마는 오히려 성욕에 미쳐버린 예브게니 본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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