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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순수문학

「승부」- 파트리크 쥐스킨트

by omicron2000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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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과 도전자와 한 판의 승부

 
승부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승부』는 삶의 축소판과 같은 이야기다. 늙은 고수이자 체스 챔피언인 〈장〉과 예기치 못한 포석과 공격으로 챔피언의 허를 찌르는 젊은 도전자의 한판 승부가 장자크 상페의 그림과 어우러져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뤽상부르 공원 일대의 체스계를 주름잡던 장은 체스의 기본도 제대로 모르는 완전 초보와 어느 날 저녁에 체스 한 판을 두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낯선 젊은이가 동네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도전자의 포스가 범상치 않다. 일단 말이 없다. 거기다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한 듯한 냉담함과 무표정한 얼굴, 범접하기 어려운 외모, 몸에 밴 침착함과 자신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묘한 오라가 풍겨져 나온다. 동네 체스 챔피언 장도 이러한 오라에 압도되어 시작부터 바짝 긴장한다. 이후 체스 상식에 어긋나는 상대의 이상한 수에도 머리를 싸매고, 아무 의미가 없는 수에도 혹시 무슨 함정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원래 실수가 없는 정석 플레이로 이 바닥을 제패한 장이지만 초반부터 도전자의 기에 눌려 판이 끝날 때까지 계속 끌려 다닌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이런 풋내기는 초반에 벌써 인정사정없이 작살을 내버렸을 터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한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 낸 참사다. 이 두려움을 지닌 채 그리고 모두들 도전자를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챔피언은 어떻게 대결을 마무리할 것인가. 원래『승부』는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집『깊이에의 강요』에 수록된 작품이었지만, 2019년 장자크 상페의 그림과 함께 어우러져 다시 소개되었다. 열린책들에서는 이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리뉴얼 시리즈에 맞춰 새로운 번역과 새로운 디자인으로『승부』를 선보인다. 쥐스킨트는『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이후 유럽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모든 관례를 깰 정도로 전 세계 독서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 코리에레 델라 세라 쥐스킨트의 작품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문학 작품과도 다른, 유례가 없는 동시대의 문학에서 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 르 피가로 쥐스킨트의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사건들 때문에 도저히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다. -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장자크 상페는 위대한 예술가다. 일상의 부조리함을 섬세한 선과 세련된 프랑스식 유머로 묘사하는 우리 시대의 거장이다. - 뉘른베르크 차이퉁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출판
열린책들
출판일
2020.04.20

 늙은 체스 챔피언에게 한 젊은이가 도전한다. 그는 실력이 검증된 바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관객은 당연하게도 챔피언의 승리를 점쳤고, 아마 챔피언 또한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도전자의 수는 점차 과감해졌으며, 그는 초보자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힘없이 수를 두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관객들은 도전자가 사실 놀라운 실력을 숨긴 고수라 여겼고, 예측불허의 공격에 챔피언은 당황한다. 하지만 게임은 결국 챔피언의 승리로 끝났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도전자는 정말로 별 실력 없는 초보였기 때문이다. 챔피언조차 당황할 정도로 변칙적인 수는 단지 그가 체스를 잘 몰랐기 때문에 둘 수 있는 수였고, 도전자는 그저 고민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사실 챔피언은 간단히 그를 이길 수 있었지만, 도전자의 기세에 말려들어 불필요한 접전을 했던 것이다. 패배한 도전자는 자리를 떠나고, 챔피언도 진정한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같은 작가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콘트라베이스」와 비슷한 유형의 책이다. 짧고, 한정된 장소와 인물을 다루며, 감정과 상황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다. 관객의 심정은 전달되나 두 체스 플레이어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데, 이들의 행동만으로도 늙은 챔피언과 젊은 도전자가 어떤 인물인지 그려진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작품의 의도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있다. 저자는 챔피언을 몰아세운 도전자의 과감한 수를 용기있다며 띄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체스 플레이어로서 수준 미달이며 무례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해서 승리를 얻어낸 챔피언을 노련하다며 높이지도 않는다. 그는 초짜에게 휘둘린, 챔피언이라기엔 부족한 자다. 그럼 작가는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가? 그런 건 없다. 「콘트라베이스」와 같이, 그저 독자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는 것이 전부다. 체스 게임 하나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우리는 다시 한 번 그것을 필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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