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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철학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법정, 최인호

by omicron2000 202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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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볼 수 없을, 세 사람의 영원한 대화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법정과 최인호의 네 시간에 걸친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행복과 사랑, 삶과 죽음, 시대정신과 고독 등 11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깊이 있는 사색과 시적 은유로 가득한 언어를 주고받았다. 이 책은 원래 최인호가 생전에 법정의 기일에 맞추어 펴내려고 했다. 법정이 입적한 이듬해인 2011년, 암 투병 중에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했던 최인호는 이후 병이 깊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2013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최인호는 병이 깊은 중에도 반드시 법정 스님의 입적 시기를 전후해 책을 펴내라는 유지를 남겼고, 그의 뜻은 법정의 5주기를 즈음하여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최인호는 생의 말년에 왜 이 책을 마음에 크게 두었을까? 그 이유는 이 책의 〈들어가는 글〉과 〈나오는 글〉에 잘 드러난다. 샘터라는 잡지에 각기 다른 소재로 인기 연재물을 쓰면서 시작된 첫 만남 이후 30년 동안 두 사람은 열 번 남짓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수필가로서, 소설가로서 당대를 대표한 법정과 최인호는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하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최인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소설 《길 없는 길》이 법정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사연이라든가, 빗속에서 헤어지며 친형제와도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최인호는 생전의 그 인연을 이 책을 통해 이어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권의 책 속에서 법정과 동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
법정, 최인호
출판
여백
출판일
2020.02.08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최인호 작가는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한 소설 「상도」의 저자이다. 둘은 각각 불교 승려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활동하는 분야도 수필과 소설로 차이가 있었기에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둘은 인연이 있어 수 차례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책 앞부분에는 최인호 작가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든 이후 길상사에 조문을 간 것까지의 일들이 실려있는데,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2003년 길상사에서 둘이 나눈 대화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작품이다.

 각 장에는 가족, 행복, 인생 등 주제가 있고, 두 사람이 해당 주제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옮겨 놓았다. 둘이 상당히 가까운 관계였던 만큼 서로 비슷한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최인호 작가는 불교를 연구해서 불교를 소재로 한 소설도 집필한 적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 대부분의 경우 둘의 의견은 일치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 법정 스님은 불교 승려이고 최인호 작가는 기독교도였다는 종교의 차이도 있고, 종교 외에도 살아온 인생 자체가 달라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하며, 상대의 의견도 옳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럴 때에는 독자도 둘 모두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한 번 다잡을 수 있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 법정 스님은 불교의 관점에서, 최인호 작가는 기독교의 시점에서 해석을 함에도 같은 의견이 나올 때도 있는데, 이는 종교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둘의 대화는 내용으로만 따지면 일반적인 불교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법정 스님의 평소 철학을 알고 있다면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복잡한 논리와 추론을 통해 생긴 철학이 아닌, 일상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기에 이해가 어렵지도 않고, 내용만 두고 보면 다른 책과 크게 차별화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둘의 대화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법정 스님은 2010년에, 최인호 작가는 2013년에 사망하였지만 살아 있는 독자가 개입함으로써 이 책은 사실상 세 명의 대화가 된다. 두 사람이 독자의 말을 직접 들을 수는 없겠지만 둘의 대화 중간중간에 독자가 나서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지는 "제 생각은 그와 조금 다릅니다"라고 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두 사람의 생동감 있는 대화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은 나 자신이 그 속에 직접 참여한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며 나처럼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있는 한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는 언제까지나 대화를 나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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