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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포스트 아포칼립스

「메트로 2033」- 드미트리 글루홉스키

by omicron2000 202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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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비참한 인류의 구원자, 땅 속의 오디세이아

 
METRO 2033(메트로 2033)(제우미디어 게임 원작 시리즈)
『METRO 2033』은 지하철역이 하나의 도시가 된다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판타지소설이다. 실제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에 근거하여 생생하게, 실제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2033년 각 지하철역은 작은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각 노선을 따라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 세상의 마지막 전쟁 후 인간은 모두 지하철로 숨어들었다. 지하철의 각 역들은 이제 하나의 도시가 되었고, 작은 국가가 되었다. 아직도 지상은 사람을 태워버릴 듯한 방사선이 나돌고 인간들은 이제 남은 인류를 위해 마지막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데…….
저자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
출판
제우미디어
출판일
2010.04.20

 어느 날 핵전쟁이 발발했고, 사람들은 방사능 낙진을 피해 지하로 들어갔다. 땅 속의 지하철역, 일명 '메트로'로 도망친 사람들은 플랫폼 위에 집을 짓고 선로 위를 걸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들조차 안전하지는 못했다.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들이 지상으로부터 밀려들어왔고, 사람들은 점점 힘이 약해졌으며, 그마저도 역마다 여러 세력으로 갈라져 싸웠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르티옴은 차를 기르는 조용한 역 베데엔하에 살고 있었는데, '검은 존재'라 불리는 돌연변이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자 의문의 남성 헌터의 말을 듣고 메트로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대단히 깊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방공호로 사용될 목적도 있다고 하니 핵전쟁 이후 사람들이 지하철로 들어갔다는 설정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무엇보다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라는 이 설정이 작품의 최대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하철의 구조상 역과 역 사이에는 길고 어두운 선로가 있다는 점이 사람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역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서로 경계할 수밖에 없으며, 심한 경우에는 지하철역 몇 개가 합쳐진 공동체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저자는 실제 러시아에 있는 여러 단체들을 메트로에 그려냈는데, 소련을 숭상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붉은 라인, 네오나치 세력이 모인 제4제국, 거대한 상인 집단인 한자 동맹 등 수많은 세력이 등장한다. 러시아 SF 문학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정부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자는 현실의 러시아를 메트로에 투영해서 각 집단의 그림자를 아르티옴을 통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실제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네오나치와 과격 공산주의자들, 겉으로는 선량하지만 실체는 속물적인 광신도 단체 등이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메트로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점 때문에 '메트로 유니버스'가 만들어져서 큰 인기를 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헌터의 말을 듣고 멜니크라는 사람을 찾으러 가는 (그리고 멜니크를 만나 검은 존재를 제거하는) 아르티옴의 여정은 길고 험난하지만, 길만 기억한다면 크게 복잡하지는 않다. 역을 지날 때마다 비슷한 패턴을 거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다음 역을 지날 때까지 동행하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 사람은 다음 역에서 죽고(혹은 아르티옴과 떨어지고) 다른 안내자를 만나는 식이다. 부르봉이 죽자 칸을 만나 도움을 받지만, 얼마 뒤 칸을 놓치자 미하일을 만나고, 그가 죽으니 이번에는 붉은 여단의 전사들에게 도움을 받는 식이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 역마다 상황의 차이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패턴이 반복된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는다. 아르티옴은 자신이 만난 모두가 죽었다면서 절망에 빠지긴 하지만 말이다. 아르티옴은 이처럼 힘겹게 여정을 떠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정의 종착지는 자신의 집이 있는 베데엔하인데, 이 점에서 「메트로 2033」은 오디세이아를 연상시킨다. 명목상으로는 메트로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을 검은 존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떠난만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긴 하다.

 「메트로 2033」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모호함이다. 작중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어떤 방향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 누군가는 유령이라 하고, 누군가는 환각이라 하는 등 여러 해석을 보여주지만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후반부에는 '검은 존재가 사실 인간을 도우려 하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는데, 검은 존재가 인간을 속여 메트로를 뺏으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또한 검은 존재가 몰살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모호함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핵전쟁과 종말에 관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이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스스로 칭기즈 칸의 마지막 환생이라 주장하는 칸은 핵무기가 지옥을 파괴해 버려 갈 곳이 없는 망자들이 터널을 배회하는 것이라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의외로 메트로의 여러 기현상을 잘 설명하기에 설득력이 있다. 미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유독성 가스 내지는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이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가스가 나오는 터널과 역이 등장하기에 이 또한 설득력있다. 아르티옴은 그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믿지 않았고, 어느 것을 믿을지는 독자의 마음이다.

 다만 이런 모호함이 게임화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랜 감은 있다. 메트로 시리즈는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뛰어난 작품성의 게임으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데, 게임의 특성상 소설과 같은 모호함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검은 존재가 인간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 사실로 나와 아르티옴의 여정은 메트로를 오히려 죽인 것이 되었고, 유령도 게임에서는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메트로 시리즈의 소설과 게임 스토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다가 원작에서도 검은 존재가 인간을 도우려 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므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메트로 시리즈의 게임화는 소설을 게임으로 만든 예시 중 대단히 성공적인 축에 든다. 따지고 보면 메트로 시리즈의 게임화는 「메트로 2033」과 「메트로 2035」 사이에 아르티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등 순기능이 많고,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원작을 적절히 각색해 액션을 강조하였으며, 원작자 드미트리 글루홉스키조차 호평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니 메트로 시리즈만의 강점이라 할 만하다. (스토리가 다르다지만 평범한 청년 아르티옴이 일당백의 전사가 된 점만 빼면 괴리감이 크지는 않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는 완전히 달라진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현실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총알일 뿐이지만 메트로에서는 총알이자 화폐로 사용되기 때문에 경제 관념이 다르고, 현실에서 빠른 이동과 소통을 위해 판 지하철 선로가 오히려 소통을 막는 벽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물의 의미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생각도 세계를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모로 현실과는 다르게 사고가 뒤틀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게임의 설정이 맞다면 결말에서 아르티옴이 메트로를 구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지킨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메트로 2033」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아르티옴의 여정 자체에 있지는 앖고, 그 과정에서 만난 모든 등장인물과 그들의 견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등장인물들의 주장에 모호함이 담긴 것 또한 최대한 다양한 시각에서 본 세계를 묘사하기 위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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