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포스트 아포칼립스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by omicron2000 2020. 8. 20.
728x90

외로운 인간이자 전설적인 흡혈귀의 비극적인 생존기

 
나는 전설이다(밀리언셀러클럽 18)
세계 공포 소설과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흡혈귀 소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1954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핵전쟁 이후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모두 흡혈귀가 되고 유일하게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이 홀로 그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지난 50년 동안 공포 소설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이 작품은 고고한 귀족 흡혈귀나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좀비 대신 서로 전염시키는 대규모의 흡혈귀 병이라는 섬뜩한 아이디어를 최초로 선보였다. 이러한 설정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새벽의 저주> 등 공포 영화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비롯하여, 최근 인기를 끈 <28일 후>, <레지던트 이블>, <블레이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에 사용되었으며,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좀비 돌풍을 일으킨 <바이오 해자드>, <하우스 오브 더 데드> 등 인기 게임들의 주요 설정이 되기도 했다. 지구에 핵전쟁과 세균 전쟁이라는 대재앙이 지나간 후, 전 인류가 낮을 싫어하고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돌연변이 흡혈귀로 변한다. 주인공 네빌은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딸, 주변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 흡혈귀가 된 암울한 상황에 처한다. 인류가 멸망하고 흡혈귀가 날뛰는 세상임에도 네빌의 하루 일상은 평온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게 반복적이며, 죽을때까지 지속될 지긋지긋한 일상은 차라리 죽거나 흡혈귀가 되는 것보다 더 괴롭고 암울하다. 리처드 매드슨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1950년대 미국의 중산층 남성이 전쟁 후 겪은 일상의 공포를 패러디하며, 흡혈귀들의 세상에 혼자 남은 인간으로서 네빌이 보여주는 마지막 선택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관념들이 뒤집히는 미래상을 암시한다.
저자
리처드 매드슨
출판
황금가지
출판일
2013.07.31

 리처드 매드슨은 호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로, 그의 대표작인 「나는 전설이다」는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소설과 영화의 인기가 아닌, 좀비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에 있다. 현대 매체의 좀비물은 대다수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으나 해당 작품조차 「나는 전설이다」에서 따온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본작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흡혈귀가 등장하는데, 좀비 개념 자체가 「나는 전설이다」 이후에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흡혈귀가 창궐한 세상에서 최후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생존기를 다루고 있다. 흡혈귀들은 햇빛 아래에서 활동하지 못하기에 낮에는 잠들어있는 흡혈귀를 죽이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흡혈귀를 막는 생활을 하는데, 홀로 남아 흡혈귀에 맞서는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갖은 수를 써 그 개를 길들이려 하지만 죽어버리는 부분이라거나, 흡혈귀를 보고 사람을 연상해 고뇌하는 장면이 그렇다. 후반부에서 그는 살아있는 여자를 만나지만, 이조차도 그의 외로움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만남이 그의 죽음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끝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이렇다. 흡혈귀가 되어 이성을 잃는 자들이 있는 반면, 그에 적응해 이성을 유지한 채로 살아가는 생존자 집단이 있었으며, 그녀는 그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흡혈귀처럼 햇빛에 약하기 때문에 주인공과는 반대로 낮에는 잠들어 있다가 밤에 활동하였고, 그동안 주인공이 죽였던 흡혈귀들 중에는 그 구성원도 있었다. 서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협력할 수도 있었겠지만 활동 시간이 완전히 달랐기에 만나지 못했고, 결국 협력이 가능한 선을 지나쳐버린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주인공은 낮마다 잠들어있는 동포를 죽이고 사라지는 살인마와도 같아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처형당하기 전 여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좀비 장르를 개척한 작품치고는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흡혈귀 전설에 대한 오마주 내지는 패러디의 성격이 강하다. 거울과 십자가를 두려워하며 마늘에 약하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 죽는다는 것까지 흡혈귀 전설을 차용한 부분이 많지만 이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종교적 거부감에서 비롯하기에 생전에 기독교를 믿었던 흡혈귀들만 효과가 있을 뿐, 무신론자였던 흡혈귀는 십자가를 비웃기까지 한다. 또 거울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흡혈귀가 된 모습이 비쳐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흡혈귀에 대한 정밀한 실험을 통해서 알아냈는데, 항상 성과를 본 것은 아니었다. 마늘이 어째서 흡혈귀 퇴치 효과를 가지는지 실험하기 위해 과학책을 뒤져가며 마늘 성분을 추출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마도 생전에 갖고 있던 '흡혈귀는 마늘을 싫어한다'라는 생각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다 심리적인 원인인 셈이다. 이렇게 흡혈귀 전승에 있는 미신적이고 기독교적인 내용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과학 소설의 면모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전설이다」는 흡혈귀에 대한 테마를 반전시킨 작품이다. 흡혈귀(뱀파이어)라는 소재에 대해 생각해보면, 흡혈귀는 사람과 같은 이성을 지녔지만 살기 위해선 사람을 죽여 피를 취해야 하기에 사람과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흡혈귀를 다룬 작품을 보면 고독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잦다. 본작의 주인공은 그 정반대로 살기 위해서 흡혈귀를 죽이고 다니는데, 생존자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흡혈귀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종족만 다를 뿐 처한 입장과 외롭다는 점은 동일하기에 「나는 전설이다」는 흡혈귀의 입장에서 쓴 생존기라 볼 수 있으며, '전설'이라는 표현 또한 주인공이 전설 속의 흡혈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은유일 것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