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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SF

「유년기의 끝」- 아서 C. 클라크

by omicron2000 20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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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인도를 받아 도달한 이상적 진화의 끝

 

유년기의 끝

“인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인류를 넘어선 존재, 지구를 넘어선 인간을 그린 아서 C. 클라크의 대표작 2017년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어떻게 기억되고 싶느냐는 질문을 받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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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 지구에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접근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스로를 오버로드라고 부른 그들은 UN과 접촉해 지구의 지배권을 요구한다. 당연히 여기에 반대한 국가도 있었으나 오버로드의 압도적인 과학 기술을 접하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외계에서 온 독재자들의 지배는 의외로 인류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냉전이 종식되고, 국가 간 갈등이 해소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악습이 사라지는 등 인류 사회는 오버로드의 지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오버로드는 지구를 이상적인 세계로 만들어 주었지만, 오버로드는 인류에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여기에 반발감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다. UN의 사무총장 스톰그렌은 오버로드와의 면담에서 플래시를 이용해 그들의 모습을 본 유일한 인간이었는데, 그가 납치당할 정도로 오버로드에 대한 불신이 강해지자 그들은 50년 뒤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50년이 지나자, 약속대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 오버로드는 날개와 꼬리가 달린, 마치 악마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버로드의 통제 하에 50년 이상 살고 있었기에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뿐이었고, 편견이 없는 아이들은 그 모습에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 외형에 혐오감을 느낀 자들이 저항할 것이 분명했기에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오버로드에게 완전히 순응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목적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던 잰 로드릭스는 우주선을 타고 밀항해 그들의 행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오버로드의 지도자를 만나 듣게 된 진실은 이랬다. 오버로드는 육체와 정신 모두 고도로 진화한 종족으로, 마치 신과도 같은 오버마인드라는 존재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오버마인드란 한 종이 진화를 거듭해 하나의 정신적인 개체로 합쳐진 상태를 말하는데, 오버로드는 진화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아 오버마인드가 될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버마인드가 될 잠재력이 있는 종족, 인류를 발견해 무사히 오버마인드로 승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 것이다. 오버마인드가 된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도 같아 원시 인류는 미약한 정신력으로 이를 예지해내 오버로드의 모습을 두려워했고, 이것이 악마의 모습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잰은 지구로 돌아갔고, 인류가 오버마인드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인류의 유년기는 끝이 난다.

 아서 C. 클라크의 작품답게 난해해 보이지만, 당시 SF의 풍조를 고려하면 목적이 제법 명확해 보이는 책이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끝없는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이른바 냉전 시기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긴장 상태였다. 그리하여 냉전 시기 SF 작품을 보면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소망이 드러나는 경우가 잦다. 대표적으로 영화 <콜로서스(Colossus: the Forbin Project)>는 미국의 슈퍼컴퓨터가 소련의 슈퍼컴퓨터와의 통신을 요구하며 핵무기로 정치인들을 협박해 강제로 냉전을 종식시키는 내용이고, <지구가 멈추는 날(the Day Earth Stood Still)>은 강력한 외계인이 찾아와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에 지구 내 분쟁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영화다. 외계의 전능한 존재가 분쟁을 끝낸다는 점에서 「유년기의 끝」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단, <콜로서스>는 1970년에 개봉했기에 직접적 관련은 없고, <지구가 멈추는 날>은 1951년에 개봉, 「유년기의 끝」은 1953년에 출판되었으니 이 둘 사이에 접점이 존재한다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비슷한 주제의 다른 작품이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유년기의 끝」만의 특징을 꼽자면 오버마인드로의 진화라는 소재일 것이다. 인류 진화의 궁극적 종착점을 상징하는 오버마인드는 저자의 다른 작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데이비드 보먼이 모노리스에 들어간 상태, 스타차일드와도 유사하다. 그 과정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보다 우월한 종족의 인도를 받아 해당 종족과 동등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맥락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육신을 벗어난 정신적 생명체라는 점은 단순히 아서 C. 클라크가 진화의 종점으로 여겼던 형태로 보인다. 다만 「유년기의 끝」에 한해서 해석한다면 '모든 인류의 정신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중에서 두드러지는 주제는 냉전이지만, 전쟁 외에도 수많은 갈등과 분쟁이 묘사되었는데, 전 인류가 하나가 된다면 이런 모든 분쟁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우월한 타인의 힘으로 쟁취한 평화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로 냉전 종식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인류를 돕는 오버로드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정작 UN 대신 오버로드가 집권하자 유토피아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유년기의 끝」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기세를 보이는 시기였기에 그런 시선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열등한' 인류를 '우월한' 오버로드가 다스리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 완전해진다는 것은 백인의 의무를 연상시킨다. 그 대상이 유색인종에서 인류 전체로 바뀐 것뿐이니 현대 독자들에게는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콜로서스>와 <지구가 멈추는 날>과 비교한다면 이 둘은 인류에게 조금 과격한 중재를 제안했을 뿐이지만 「유년기의 끝」에서 오버로드는 인류에게 그보다 직접적이고 깊게 관여했으니 시대적 괴리감이 있는 현재 거부감이 더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더해 아서 C. 클라크 특유의 평면적인 인물상 또한 이 작품이 현대의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년기의 끝」은 수많은 창작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SF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임에는 분명하지만, 고전이 되기에는 보편적이지 못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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