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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스릴러

「저주토끼」- 정보라

by omicron2000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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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저주토끼(3판)
2022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1차 후보가 발표되었을 때 한국 문학계는 몹시 놀랐다. 첫 번째 이유는 사상 최초로 한국 소설이 두 편이나 노미네이트되었기 때문이었으며, 두 번째 이유는 그 두 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국내 문학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설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기자는 ‘무명의 부커상 후보’라는 단어를 써서 작가를 소개하기도 했다(SF계에서는 ‘어째서 정보라가 무명이냐’라며 탄식을 뱉긴 했으나). 그리고 최종 후보가 발표되었다. 그 ‘무명 아닌 무명’ 작가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가 이름을 올렸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저주토끼》에 대해 “마법적 사실주의, 호러, SF의 경계를 초월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매우 현실적인 공포와 잔인함을 다루기 위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라고 평했다. 관습과 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래도록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정보라의 쓸쓸한 이야기, 잔혹한 유머, ‘정보라’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장르의 정수가 《저주토끼》에 있다.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대를 이어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손자와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 할아버지는 오래 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친구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친구네 집안은 마을 유지인 술도가. 바른 마음으로 좋은 전통주를 제조해서 팔려고 애쓰는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사람들은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약삭빠른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정부 인사와의 친분, 인물, 접대, 뇌물은 뒷전이고 좋은 술을 만드는 데 전념한 것. 그에 반해 저질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대충 섞어 “서민들이 선호하는” 술이라고 선전하던 경쟁회사는 급기야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의 술에 “공업용 알코올이 들어간다”는 흑색선전을 퍼트리고, “그 술을 마시면 눈이 멀고 불구가 된다”며 비방을 일삼았지만 호소할 방법이 없다. 결국 매출은 떨어지고 공장은 가동을 멈췄으며, 긴 소송 끝에 할아버지 친구네 집안은 몰락하고 만다. 이에 보다 못한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저주토끼’를 어여쁘게 만들어 손수 복수에 나서는데…. 러시아를 비롯 슬라브어 권의 명작들을 꾸준히 번역해서 소개하고, 보태어 수준 높은 호러 SF/판타지 창작으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정보라 작가의 대표작.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배경과 인물과 사건들이 넘치는 10편의 작품이 아우르는 주제는 복수와 저주.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은 가차 없는 저주로 복수를 대신한다. 세상의 몹쓸 것들은 도무지 뉘우칠 줄 모르고, 우리의 주인공들인 피해자(혹은 등장토끼 혹은 등장로봇)에게 용서란 없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 책은 악착 같은 저주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자, 위로에 관한 우화들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용서하지 말자.”
저자
정보라
출판
아작
출판일
2022.04.01

 열 편의 공포 중단편들이 수록된 책이다. 저자가 저자인지라 SF 분류에 들어 있지만 로봇이 나오는 단편이 하나 들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책 자체는 딱히 SF와 연관이 없다. 사실 공포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판타지 장르에도 폭넓게 걸쳐 있기에 다루는 소재는 다양하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저주를 거는 물건을 만드는 집의 이야기이고, <머리>는 별안간 변기에서 튀어나온 말하는 머리를, <안녕, 내 사랑>은 로봇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다룬다. 이렇게나 소재가 다양함에도 굳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꼽자면 불합리함이 있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만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불행한 결말을 맞기도 하는 식이다.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에 비해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간단히 생각해 보면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지만,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나 가부장제가 현실에서도 불합리하게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메시지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작품은 <몸하다>였는데, 다른 작품은 이 정도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실질적인 대표작이라 생각한다.

 부커상 최종 후보에도 오른 작품이라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영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몸하다>처럼 좋은 작품은 좋은데 나머지 대부분은 별 감흥이 없고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같은 경우에는 식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기복이 좀 크다는 느낌이다. 후기를 보면 출판사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라면서 출판을 권했고, 저자는 오히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자 쓴 이야기라는데 어째 저자가 쓴 책과 출판사에서 본 책과 내가 읽은 책이 모두 다른 책인가 보다. 일단 권선징악은 명백히 아니고 별로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책이 나에게 잘 맞지 않았던 것도 아마 이 관점의 차이 때문일 텐데, 출판사에서도 오해한 것을 보면 애초에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게 쓰였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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