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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순수문학

「동방순례」- 헤르만 헤세

by omicron2000 202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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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고향인 동방으로 가는 순례길의 끝에는 도가의 길(道)이 있다

 
동방순례
헤르만 헤세의 독특한 걸작 『동방순례』.동양 사상에 깊이 젖어들었던 헤르만 헤세가 1929년 후반에 집필하기 시작해 1931년 4월 취리히에서 끝마친 1백 쪽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결맹’에 가입해 동방순례자들과 함께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던 H. H.의 보고서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결맹’이라는 비밀결사가 계획한 거대한 규모의 순례여행에 참가하게 된 H. H.는 동방으로 향하며 기상천외한 체험을 거듭하지만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생기면서 순례단 자체가 해체되어버리며 좌절감과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다. H. H.는 중단된 순례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자 지난 여정을 되짚으며 조사에 착수하고 결국 순례단에서 하찮은 허드렛일을 하다 사라진 ‘레오’라는 인물이 모든 사건의 핵심에 있음을 깨닫는데…….
저자
헤르만 헤세
출판
이숲에올빼미
출판일
2013.12.25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불교를 소재로 하여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동방순례」도 마찬가지로 이에 기반한 작품으로, 「싯다르타」가 불교적이라면 거기에 대조적으로 도교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서양 사람이 불교나 도교 등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 잘못된 지식과 편견으로 인해 오리엔탈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으나, 헤르만 헤세는 동양철학을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동방순례」에서 사용된 동방이란 표현도 단지 헤세가 큰 영향을 받은 도가 사상이 동방에서 시작되었기에 사용된 표현일 뿐, 영혼의 고향이 다른 곳에 있다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이름이다.

 「동방순례」의 화자는 H. H.라는 인물로, 결맹에 소속된 순례자 중 한 사람이다. 결맹이란 수천 년 전 고대부터 내려오는 비밀결사인데, 노자와 피타고라스 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속해 있던 조직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도 「동방순례」에서는 살아서 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결맹의 일원들은 영혼의 고향인 동방을 향해 순례를 떠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H. H.와 결맹의 동료들이 이 순례를 떠나며 소설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떠난 순례길이었지만, 결맹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레오가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레오는 일행의 짐을 가진 채로 사라져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H. H.의 경우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언가가 레오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물건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결국 순례에서 이탈해 연주하던 바이올린도 팔고 절망에 빠진 채 몇 년을 지내다 친구를 통해 겨우겨우 레오를 만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도 얻지 못한다. 레오는 결맹의 심판을 받기 위해 회의에 출석하라 이르고, 회의에서 사실 레오가 결맹의 최고 지도자였음이 밝혀진다. 레오는 지금까지의 과정이 다 시련이었다고 말한 뒤 H. H.는 그 시련의 극복에 실패했지만 다시 결맹에 들어올 수 있는 새로운 시험을 제시하였고, H. H.는 도가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평소 도가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받은 영향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레오가 사실 최고 지도자였다는 점이 그렇다. 도가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이것과 저것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장자」에서는 가장 작은 먼지가 가장 큰 산보다 커다랗고, 막 태어난 아기가 노인보다도 나이가 많을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동방순례」의 내용과 연관짓자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하인이 가장 높은 최고 지도자와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또 레오가 보여준 모습은 노자가 말한 이상적인 군주상과 닮아 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상적 군주란 백성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결맹의 일원들은 레오가 최고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최고 지도자를 존경하며, 결맹은 무리없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H. H.가 작가 르만 세의 분신격인 인물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동방순례」는 길지 않은 분량으로 도가의 핵심적인 사상을 정리해서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놓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헤세 본인의 의견을 넣기보다는 노장의 사상을 20세기 유럽 분위기로 옮겨놓기만 한 듯하다. 말하자면 도가의 두 고전인 「도덕경」과 「장자」에 대한 수천 년을 건너뛴 오마주인 셈이다. 여기에 '순례'라는, 기독교적이면서도 서구적인 이미지를 결합해 도道를 찾는 과정을 순례길로 비유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탈할지라도 다시 결맹에 들어올 기회를 줌으로써 도道를 찾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헤르만 헤세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례'길'의 이미지는 도가의 도( 道)와도 비슷하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H. H.가 이 시련을 통해 순례길을 걷는 과정은 작가 본인이 도가 사상을 공부하고, 그 도를 좇는 과정과도 같으며, 레오는 노자요 장자이자 그에게 영감을 준 인류 역사의 스승들인 셈이다. 헤르만 헤세가 살던 시절의 '동방'은 전쟁과 수탈로 인해 고통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그 곳을 영혼의 고향이라 부르며 향했다는 것은 그만큼 노장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세속의 전쟁은 도인의 순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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