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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순수문학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by omicron2000 202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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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고도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세계문학전집 43)
현대극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고도를 기다리며』.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전통적인 사실주의극에 반기를 든 전후 부조리극의 고전으로 칭송받고 있다. 시골 길가의 마른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부랑자 두 사람과 난폭하고 거만한 폭군과 노예, 그리고 막이 끝날 때마다 나타나서 이 연극의 중심 테마인 ‘고도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귀여운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일랜드 출신인 베케트는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국 국민이라는 안전한 신분을 이용해 프랑스 친구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그가 가담하고 있던 단체가 나치에 발각되어 당시 독일의 비점령 지역이었던 프랑스 남단 보클루즈에 숨어살게 되었는데,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얘깃거리 하나가 동이 나면 또 다른 화제를 찾아내야만 했는데 바로 이것이 '고도'에 나오는 대화의 양식이다. 이렇게 베케트는 자신의 체험에서 얻은 사실적인 요소들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성을 극도로 단순화함으로써 작품을 창조해냈다.
저자
사뮈엘 베케트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2.02.20

 「고도를 기다리며」는 짧고 간단한 희곡이다. 얼마나 간단하냐면, 등장하는 인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중간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소년과 지주, 노예 정도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단 두 명의 사람만 있어도 진행이 가능할 수준이다. 거기에 더해 내용도 특별할 것이 없다. 그 두 명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결말에 고도가 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제목 그대로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인 작품이다. 이처럼 내용은 대단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책은 막상 펼치면 만만치 않은 깊이와 난이도를 자랑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고도를 기다리며」는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쓰였고, 1953년에 초연했다.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당시는 문학·미술·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쟁의 후유증을 겪던 시기이기도 하다. 주로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과거의 가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놓인 배경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에 대한 은유인 듯하고 포조와 럭키는 과거의 봉건적인 사회를 말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이나 진리일 수도 있고, 자유일 수도 있으며, 절망에서 그들을 끌어올려 줄 희망찬 새 시대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가 되지 않고서야 둘이 그렇게까지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가 누구인지가 아닌, 그가 오지 않으리란 것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올 것이라며 기다리지만, 고도는 오지 않고 소년만이 와서 고도는 오늘 오지 못할 것이며 내일 올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심지어 소년이 하는 말을 보면 정황상 그들은 계속 똑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내일은 고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만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보면 관객 입장에서는 고도가 오지 않으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고도는 오지 않음으로써 작품을 완성시키며, 오지 않는다는 점이 그 정체성과도 같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기다리지만 날짜를 미루며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고도의 실체가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말하자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가상의 존재를 상상해 내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극도로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이렇게 누군가를 상상해서라도 의지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고도가 오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소년 또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인만큼 고도를 '믿고' 있는 아이일 수도 있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나마 고도가 온다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양치기 소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 더 무게가 기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극의 형태를 가지며,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될 수 있다. 포조와 럭키의 모습을 통해 봉건적 사회를 비꼰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나와는 반대로 고도가 실체가 있는 존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작품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만은 일치하는데, 이로 미루어 사뮈엘 베케트는 단순히 혼란스럽고 침체된 사회상을 부조리하게 묘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후대의 독자들이 수많은 다채로운 해석을 내놓았으니, 이것만으로도 문학으로서의 소임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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