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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예술

「천천히 그림 읽기」- 진중권, 조이한

by omicron2000 202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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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천천히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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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이한
출판
웅진출판
출판일
2003.11.18

 조각이 되었든 회화가 되었든 보통 미술작품은 본다고 하지 읽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음악이 청각의 예술이듯 미술은 시각의 예술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단순히 문장만 읽지 않고 작가의 사상이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는 것처럼,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눈으로만 보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이 많다. 예를 들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어떤 시대였는지,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어떤 계기로 해당 그림을 그렸는지 등이다. 문학의 경우 작가가 서두에 의도를 적어놓는 경우가 있고 문자로 쓰여있어 파악이 쉽지만 미술작품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미술의 문자를 알 필요가 있으며, 그 미술의 문자란 바로 그림에 사용되는 기호와 상징을 말한다.

 예술사를 보면 예술가들에게도 유행이 있다. 시대나 장소에 따라 주가 되는 화풍과 두루 사용하는 기호가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계절을 다룬 그림을 보면 각 계절을 상징하는, 혹은 각 계절마다 자주 등장하는 사물이 있기 때문에 그림의 일부만 보거나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은 그림이라도 기호를 통해 어느 계절을 그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중세 유럽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그림을 보면 예수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쉽지만 그의 제자들이나 천사들, 또는 수많은 기독교 성인들은 외모로 구분하기가 힘들다. 화가들은 그림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보이기 위해 특정 사물을 들고 있는 식으로 나타내었고, 이 사물은 어트리뷰트라고 불린다. 이를 활용해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중세 시대의 그림을 보고 그림 속 인물이 어떤 어트리뷰트를 가지고 있는지를 통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성경에서 해당 인물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통해서 화가가 그림을 그린 의도까지도 파악이 가능하다. 어트리뷰트는 단순히 그림 속 소품일 뿐이지만 화가의 의도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까지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벽화와 중세 미술의 어트리뷰트라고 하면 낯설어 보이지만 사실 이렇게 '그림을 읽는' 방법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발달했으며, 따라서 우리도 이미 접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시대의 수묵화이다. 당시 선비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하여 각 계절을 대표하는 식물이라 불렀고, 그림에서 이 중 어떤 식물을 강조하는지를 통해서 그림에 눈이 내리고 있지 않아도 대나무를 보고 겨울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조선 후기에 발달한 문자도의 경우 충, 효, 예와 같은 유학의 중요한 미덕을 그림으로 나타내며 고사에 엮인 기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문자도 효(孝)에는 잉어와 장난감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래된 고사에서 유래한다. 늙은 어머니께서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효자가 강으로 나가니 잉어가 저절로 튀어나왔다는 전설과 부모를 웃게 해드리기 위해 다 큰 사람이 아이 때 입던 옷을 입고선 재롱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해당 문자도를 그린 화가는 고사 속의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듯 그림을 감상할 때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감상이 가능하지만 해당 그림에 사용된 소재나 화가의 의도를 파악해가면서 그림을 읽으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될 수도 있고, 더 깊은 감상이 가능하기도 하다. 과거에는 같은 시대와 지역에 두루 사용되던 기호가 존재했으나 현대미술을 하는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기호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현대미술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누구나 의미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기 마련이다. 한 명의 작품 여러 개를 관찰하면 그중에서 공통되는 기호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이 해당 작가의 작품을 읽는 방법인 셈이다. 연구의 대상이 한 시대에서 한 사람으로 변했을 뿐, 고전미술과 차이가 크다는 현대미술도 작품을 읽는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사실 비단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영화나 게임 등 다른 매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구도나 색채에서 감독의 의도를 찾는 과정 또한 읽는 것이고, 게임 제작자가 게이머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는 것 또한 읽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림을 읽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모든 예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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