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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SF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by omicron2000 202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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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라는 장르의 필요조건을 정의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과학소설 작가 테드 창의 SF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단 한 권의 작품집으로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 단편소설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명성을 얻은 테드 창의 소설집이다. 과학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상상력과 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철학적 사유를 선사하는 이 책은 기막힌 상상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읽고 나면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는 여덟 편의 단편을 수록했다. 천상의 시작점으로 이어지는 탑을 건설하는 고대 바빌로니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바빌론의 탑’, 언어학자인 한 여성에게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외계인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량 생산된 골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일흔두 글자’, 수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 수학자 이야기 ‘영으로 나누면’ 등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지적으로 도전적이고 대담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감동적인 여운을 남긴다.
저자
테드 창
출판
엘리
출판일
2016.10.19

 현재 가장 주목받는 SF 작가를 꼽으라면 테드 창일 것이다. 아직 출판한 책이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의 작품은 다른 SF 소설과는 달리 소재나 방향성부터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으로는 보통 'SF 소설'이라고 하면 떠올리기 힘든 소재를 많이, 그리고 잘 사용한다는 점이 있다. 과학과는 동떨어진 것으로만 보이는 바벨탑 이야기나 유대교 전설에 등장하는 골렘과 언령 등, 언뜻 보면 SF보다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내용이 자주 나오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본다면 틀림없이 SF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드니 빌뇌브 감독이 <컨택트>로 영화화한 '네 인생의 이야기'처럼 외계인, 우주선 등 일반적 SF의 소품을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름아닌 '언어'를 주 소재로 삼는 등, 그는 소재의 선정에 제약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SF와 판타지의 구분 자체가 모호하기는 하다. 둘 모두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기 때문이다. SF는 과학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타임 머신이나 순간이동 등 SF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도 딱히 과학적으로 정밀한 고찰을 통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요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작품이 드물 정도이다. SF 영화와 대중매체를 연구하는 J. P. Telotte 교수는 과학 영화란 과학과 과학적 가능성, 심지어는 아마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세 가지 분류를 제시했다. 인간 세계 외부의 존재와의 접촉을 다루는 경우(marvelous, 경이), 과학기술이 사회와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fantastic, 환상), 그리고 기술의 변화에서 비롯한 자아의 대체(uncanny, 이색)이다. 이 분류는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고, 경우에 따라 하나의 작품이 여러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으며, 하나만 만족해도 SF로 볼 수 있다. Telotte 교수의 정의는 대부분의 경우엔 들어맞지만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스타 워즈> 시리즈는 이 분류상 명백한 SF지만 상당수의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일 뿐 SF가 아니라 주장한다.), 테드 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상당히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등장인물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이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우주의 일부분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마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판타지인 셈이다.

 우선 수록 단편 중 네뷸러상을 수상한 「바빌론의 탑」을 보자. 여기서 저자는 바벨탑 전설을 각색해 가상의 세계에서 바벨탑을 짓는 노동자가 마침내 바벨탑 건설을 완료해 하늘에 닿는다는 내용으로 진행하였다. 바벨탑 전설 자체도 전혀 과학적이지 않을 뿐더러 하늘에 닿는다는 점도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하늘에 닿은 주인공이 천장을 뚫자 물이 쏟아져 나왔고, 물살에 휩쓸린 그는 지상에서 눈을 뜬 것이다. 이 우주는 천장이 바닥과 연결된, 원통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가 떠오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구형인 우리의 지구와는 다른 세계를 묘사하였으며, 이론적으로 원통형의 우주 또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Telotte 교수의 정의에 부합한다. 여기에 더해 테드 창이 제시한 또 다른 SF의 조건을 적용한다면 주인공이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는 장면 자체가 이 작품을 SF로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바벨탑이 너무나도 높아 오르는 데에만 수 년의 세월이 걸리며, 짐을 수송하는 노동자들의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탑 곳곳에 농장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현실적인 설정은 덤이다.

 이처럼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재를 가지고 이를 과학적으로, 아니 'SF적으로' 표현했다. 꼭 판타지적인 소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SF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말에 마법적 힘이 깃들어 있다는 주술적 표현인 언령까지 소재로 쓸만큼 '언어'를 잘 활용하는데, 자연과학보다는 사회과학에 가까운 언어학을 이용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처럼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 장르에 있어서 그 경계를 넓히고, 한계를 늘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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