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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판타지

「베오울프」- 케이틀린 R. 키어넌, 닐 게이먼

by omicron2000 2020.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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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나고, 영웅이 죽음을 맞이하다

 
베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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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닐 게이먼, 케이틀린 R 키어넌
출판
아고라
출판일
2007.11.15

 서사시 '베오울프'는 고대 영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베오울프라는 이름의 게르만족 전사가 괴물 그렌델과 그의 어미, 그리고 사악한 용을 물리친다는 내용의 북유럽식 영웅 서사시이다. 이 책은 그 서사시를 판타지 작가 닐 게이먼과 케이틀린 R. 키어넌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평면적인 고전문학에서 유기적인 스토리와 입체적 인물 묘사가 두드러지는, 높은 완성도의 판타지 소설이 되었다.

 저자 닐 게이먼은 소설 외에도 동화(코랄린, 스타더스트), 드라마(아메리칸 갓), 만화(샌드맨 시리즈) 등 수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판타지/SF 작가이다. 그는 고대 신화, 특히 게르만과 북유럽 신화에 조예가 깊고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갓>으로 만들어진 「신들의 전쟁」은 북유럽의 주신 오딘을 비롯한 고대의 신들과 대중매체, 세계화 등 현대 문물을 상징하는 신들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력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고, DC코믹스에서 발간되는 만화 「SANDMAN」 시리즈는 그리스 신화의 모르페우스이자 모든 생물의 꿈을 상징하는 '꿈'이라는 신적 존재가 여러 인간과 신화의 인물들을 만나며 겪는 일들을 다룬다. 또 다른 저자인 케이틀린 키어넌은 닐 게이먼과 함께 샌드맨 시리즈의 몇 작품을 함께 작업한 적이 있으므로 「베오울프」 또한 원전 신화에 대한 재해석이 주요 소재라 짐작할 수 있다.

 「베오울프」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데인족 왕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그들은 기존에 오딘과 토르로 대표되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믿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남쪽에서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물론 오딘과 토르 등 그 어느 신도 등장하지 않지만, 아스가르드의 신들보다 전에 숭배된 고대의 여신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작중 시점에서 메르위프(중세 영어로 물의 여인이라는 뜻)라 불리는 이 여신은 사람들의 믿음이 사라짐에 따라 그 힘을 점점 잃어 본래의 이름도 잃어버리고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격하되었는데, 그 복수심으로 인간을 파멸시키고자 한다. 과거에 흐로드가르 왕에게도 그랬고, 작중에서 베오울프도 유혹해 인간 영웅의 아이를 낳은 다음 그 자식으로 하여금 인간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다. 서사시 베오울프에 나오는 괴물들은 별 관련이 없이 동떨어져있지만 본작에서는 유기적 구성과 기승전결을 위해 괴물들의 관계를 크게 바꾼다. 흐로드가르 왕의 성에 그렌델이 들어와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자 용사 베오울프가 그렌델의 팔을 잘라 죽이고, 그렌델의 어미를 처치하러 갔을 때 메르위프의 유혹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메르위프가 낳은 베오울프의 아들이 바로 마지막에 나오는 황금빛 용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메르위프와 싸우는 부분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대신 인물의 묘사가 대단히 정밀해지고 입체적으로 변했다. 베오울프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닌, 허풍쟁이 노인이 되었으며, 메르위프는 괴물의 어미가 아닌, 복수심에 불타는 여신이 되었고, 그렌델과 용은 베오울프가 영웅이 되기 위한 제물이 아닌,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한 명의 아들이 된 것이다.

 특히 베오울프는 작품의 진행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그렌델과 싸우는 첫 장면에서 그는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문으로 그렌델의 팔을 잘라 죽인다는 지략까지 겸비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메르위프를 만나고 온 뒤부터 성격이 바뀐다. 그렌델의 어미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그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떠받들어져 흐로드가르에 이은 왕이 되는데, 왕이 된 이후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뜨리기만 하는 나태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후반에 용이 공격하자 그는 왕국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검을 잡고 용과 싸우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되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는, 대단히 반(反)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죽음을 맞는다. 어찌 보면 심각하게 뒤틀린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초반에 나태하고 무능한 군주로만 보였던 흐로드가르 또한 베오울프와 같은 용사였다가 메르위프를 만나고 그렇게 되었다는 암시가 나오는데, 이 점에서 신의 저주를 받아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다는, 신화적이고 윤회적인 내용이 돋보인다. 북유럽 신화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불교적 시선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기에 그 틈을 파고든 마녀는 스스로의 업業으로서의 시련을 내리고, 영웅은 이를 맞는다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베오울프가 그 업을 극복했는지, 극복하지 못했는지는 독자의 해석에 달려있다.

 베오울프가 이 시련을 극복했는지와는 별개로 그는 윤회를 완전히 벗어난 인물은 아니다. 메르위프를 죽이지 못했기에 언젠가 잊힌 여신의 망령이 다른 인간 영웅을 유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윤회를 막아내는 것은 다음 용사, 위글라프의 몫이다. 그는 운페르드처럼 새로운 신 그리스도를 섬기지도 않았고, 베오울프처럼 영웅심에 취한 인물도 아니다. 그도 베오울프 못지않게 뛰어난 전사임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이렇게 순수하게 인간인 그였기에 그는 마녀의 유혹을 뿌리치는 데에 성공한다. 중반 이후 베오울프의 서사는 비극으로 일관되었지만 인간의 의지가 일말의 희망으로 남는 것이다. 이는 니체의 말마따나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거듭난다는 느낌마저 준다. 앞에서 불교적 시각으로 내용을 분석했는데, 니체의 철학 또한 불교에 근간을 둔다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베오울프의 비극과 새 시대의 희망으로 끝을 맺은 작품이지만, 사실 베오울프는 정말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도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숭배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이 완전히 독립하기 위해서는 영웅의 존재 또한 마땅히 사라져야 했고, 따라서 베오울프는 용을 해치운 뒤 죽은 것이다. 인간을 누군가를 숭배하는 존재에서 인간 그 자체로 승격시키고, 자신의 업과 함께 사라진 그가 인간에게 있어 영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잊히는 것 또한 그 업적의 일부인만큼 이 작품의 베오울프만큼 비극적인 영웅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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