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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SF

「타임머신」- H. G. 웰스

by omicron2000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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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넘어서 본 것은 인류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었다

 
타임머신(3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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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HG웰즈
출판
엔북
출판일
2009.03.09

 영국의 어느 클럽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겪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름도 없이 그저 '시간 여행자'라고만 등장하는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이 다른 시간을, 정확히는 먼 미래를 여행하고 왔다고 말한다. 타임머신이라 불리는 정교한 기계 장치를 통해 미래로 간 그는 그곳에서 엘로이라는 작은 생명체들을 만나고, 이내 몰록이라는 괴물들도 보게 된다. 엘로이들을 관찰하다 잃어버린 타임머신을 되찾기 위해 미래 세계를 돌아다니던 그는 엘로이와 몰록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되고, 도망치듯 현재 시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책은 SF 매체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타임머신'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다. 물론 웰스 이전에도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있었다. 「타임머신」보다 불과 수십 년 전의 예시로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쓴 「립 밴 윙클」을 들 수 있는데, 그 주인공 립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무려 20년 뒤에 깨어나게 된다. 일종의 미래로 가는 단방향 시간여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우라시마 타로 설화나 인도 신화에서도 특별한 경험을 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미래에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우리나라에도 신선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수십 년이 지나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타임머신」이 이런 고전적 시간여행과 차별화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신화적인 시간여행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해 겪은 일이며, 현재에서 미래로만 간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를 통해 시간여행을 과학과 이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양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 덕택에 현대 매체에서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잘 쓰고 있으니, 웰스의 「타임머신」이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타임머신은 당시의 과학 수준을 생각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일단 시간도 공간을 구성하는 세 축인 가로, 세로, 높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원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웰스가 남다른 과학적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앞뒤, 좌우로는 쉽게 움직이나 중력 때문에 상하 운동이 쉽지 않다는 점을 들며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이유도 강한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 또한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말하자면 강물에 띄운 낙엽이 중력을 받아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듯 모든 사물이 시간 상에서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도록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이 매우 커서 우리 힘만으로는 미래나 과거로 자유로이 갈 수는 없지만, 타임머신이라는 기계의 힘을 빌려 강한 출력을 낸다면 그 힘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것이 시간 여행자의 논리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매체에서 어려운 상대성 이론을 언급하며 억지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듯하면서 이해하기도 쉽다.

 웰스의 논리적인 추론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만약 먼 미래나 먼 과거에는 지금 타임머신이 있는 이 장소에 큰 산이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 시간축상에 힘을 가해 흐름을 거스르는 원리라고 하였는데, 공간은 그대로 둔 채로 시간만 움직이므로 이런 의문은 충분히 있을 만하다. 공간상에서도 일직선으로 움직이다 벽을 만나면 멈출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저자는 이 문제를 밀도로 해결했다. 시간을 거스르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해당 시간에서 밀도가 낮아지므로 반투명한 상태가 되고, 이 상태에서는 사물을 구성하는 분자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착하는 장소에서 공간이 겹치면 무사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이쯤 되면 타임머신이 정말 실존할지도 모른다 생각될 정도로 그의 설정은 일리가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서는 불가능한 가설이지만, SF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과학 이론에 잘 부합하느냐가 아닌, 논리성과 무모순성이므로 SF 작품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임머신」의 진정한 가치는 과학적 사고와 그 논리가 아니다. 물론 그쪽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작품이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타임머신보다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소는 미래의 인류인 '엘로이'와 '몰록'이다. 엘로이는 그 단어부터가 신을 뜻하는데, 미래의 엘로이들은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옷과 음식 등 모든 자원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 마치 신처럼 말이다. 그런 엘로이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몰록이라는 괴물들이다. 이들은 어두운 곳에 살아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엘로이들을 잡아가서 식량으로 삼는다. 엘로이에게 신이라는 뜻이 있듯 몰록이라는 이름에도 뜻이 있다. 몰록(혹은 몰렉, 몰레크)은 인신공양 풍습이 있던 고대 서아시아의 신으로, 성경에도 그 존재가 등장한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 괴물의 입으로 변하며 "MOLOCH!"라고 소리치는 장면 또한 여기에서 따왔다. 몰록이 엘로이를 잡아먹는 부분도 아마 이 인신공양에서 따왔을 것이라 짐작된다. <메트로폴리스> 또한 노동 계급의 비참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지, 프리츠 랑의 「타임머신」에 대한 오마주인지는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미래의 특이한 생명체일지도 모르지만, 시간 여행자가 깨달은 진실을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엘로이의 옷 등을 제공하는 자들이 바로 몰록이며, 지상을 엘로이가 차지한 대신 지하에 사는 몰록은 그 엘로이를 잡아먹었다. 말하자면 몰록이 엘로이를 식량으로 '사육'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시간 여행자는 그들이 모두 인류의 후손이며, 각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알게 된다. 엘로이는 자본가들의 후손이며, 몰록은 노동자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엘로이가 일을 하지 않음에도 풍족하고 태평하게 사는 것과 몰록이 엘로이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설명된다. 웰스가 살던 당시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가 점점 멀어지던 시기였는데, 그 격차를 반영함과 동시에 언젠가 먼 미래에는 그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책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가 단지 특정 계급을 비난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시간 여행자가 한 엘로이에게 위나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호감을 보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미래의 뒤틀린 후손들에게 그는 측은한 시선을 보낸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단순하게 비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시간 여행자와 위나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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