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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역사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홍병화

by omicron2000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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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하기에 건물은 시대에 따라간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지금까지 불교건축사를 한 호흡으로 정리한 책이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다. 일부 유명한 사찰만을 한정하여 다루거나, 불교건축에 대해 개괄하거나,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시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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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에 국교로 받아들여졌고, 신라 시대를 거치며 고려 시대에는 거대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왕족이 승려가 되고, 국가에서 불교 행사를 주최할 정도로 불교의 세가 강해졌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국가의 정치 체제를 유교로 정하며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했는데, 이 정책을 유억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은 불교를 완전히 몰락시키지도 못했고, 백성들이 불교를 믿지 못하게 할 수도 없었다. 조선 백성들은 물론, 조선 왕족이나 사대부들조차 불교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는 단순히 숭유억불이라기보단 겉으로는 유교를 중시하나 삶 깊은 곳에는 불교가 자리잡은 '외유내불'에 가까운 시대라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건국 직후인 15세기는 고려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왕실도 불교와 가까웠기에 왕릉 곁에 사찰마저 지을 정도였는데, 이런 사찰을 능침사라고 부른다. 이곳에서는 왕의 위패와 초상화를 봉안하고, 평소에는 승려들이 왕릉을 관리하다 때에 맞추어 불교식 의례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들도 불교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16세기에 접어들고, 사림이 대두되자 불교는 서서히 영향력을 잃었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생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들은 완고한 성리학을 주장하던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으로 불교식 의식인 기신재가 사라지고, 왕릉에서도 유교식 의례를 진행하게 된다. 다만, 불교과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기에 사대부 집안의 능침사라고 할 수 있는 분암 등의 건축은 여전히 이어져 왔다.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만 해도 젊은 시절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다고 하니, 16세기의 불교는 왕실에서만 자리를 잃고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병들이 일어나 적에 맞서 싸웠다. 그 보복으로 정유재란 때에는 많은 사찰이 불타 사라졌으나, 이는 오히려 불교계에 있어서 좋은 일이었다. 승병을 조직해 싸운 공을 인정받아 정부에서 불교 억압을 완화했으며, 그 보상으로 사찰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능침사와 유사하지만 제사를 올리지는 않는 사찰이 지어졌으며, 일반 사찰의 경우에도 천왕문이 유행하는 등 변화가 생긴다.

 본래 승려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사찰에도 종이를 납부하는 등의 역을 부과하게 된다. 이를 피하고자 사찰에서는 역이 면제되는 왕실원당이 되고자 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왕실보다는 민간과의 연결이 강화된 시기이다. 평민들이 점차 부를 축적하자 절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찰이 점차 크고 화려해졌기 때문이다. 동시기 양반가의 건축물과 비교했을 때 사찰이 더 발달한 기술로 화려하게 지어졌는데, 이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 유교계에서 고전적인 공법을 애용한 반면 승려 장인은 새로운 공법을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가 되면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백성들은 불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사찰의 후원자 명단을 보았을 때 이 시기에는 신분이 낮은 것으로 추측되는 이름이 크게 증가했다고도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질수록 종교에 심취하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평민들이 선택한 것은 조선의 국교인 유교가 아니라 불교였던 것이다. 이 시기를 거쳐가며 불교는 완전한 대중 종교가 된다.

 유교가 조선을 앞에서 이끈 사상이라면, 조선의 뒤에는 불교가 있었다. 전면에 부각되지 않기에 특별히 한 일이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나, 사찰의 구조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활발하게 시대와 상호작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현재의 사찰은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불교는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만큼 큰 세력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항상 민중과 함께할 수 있었고, 비로소 한국의 민속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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