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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순수문학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by omicron2000 2020.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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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수학자의 메멘토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의 장편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노수학자 ‘박사’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 ‘루트’가 숫자로 소통하며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지와라의 작품해설을 함께 수록해 수학자의 눈으로 본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 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만나볼 수 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지만 열 살배기 아들이 있는 미혼모인 ‘나’는 1992년 봄, 가사도우미 소개소를 통해 ‘특별 관리 고객’인 박사의 집으로 파견되어 일하게 된다. 박사는 교통사고 때문에 기억이 1975년에 멈춰 있고, 새로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온몸에 메모지를 붙인 데다 첫 대면에 인사는커녕 다짜고짜 신발 사이즈를 묻는 괴팍한 노인에게 당황하지만, 곧 그것이 수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박사만의 방식임을 알아차린다. 매일 아침 낯선 사람으로 만나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해도, 박사의 따뜻한 마음과 수에 대한 열정만은 항상 그대로임을 알게 된 나와 나의 아들 ‘루트’는 박사의 첫 친구가 된다. 수에 대한 애정과 한신 타이거스에 대한 관심을 통해 셋의 관계는 더욱 두터워지고, 1년간 빛나는 추억을 만들어 나간다.
저자
오가와 요코
출판
현대문학
출판일
2014.08.1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는 일정 시간마다 기억이 리셋되는 남자가 아내의 복수를 하기 위해 범인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았다. 뇌에서 받아들인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변환하는 부분인 해마에 이상이 생길 경우 이렇게 최근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하는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또한 같은 질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작품의 주제도, 방향성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 점을 비교하면서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주인공이 '박사'의 집에 열 번째 가정부로 일을 하면서 겪는 일을 다룬다. 이 박사는 젊었을 때 수학을 연구하던 사람으로, 사고를 겪어 80분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기억상실증을 앓는다. <메멘토>의 주인공이 기억을 남기기 위해 몸에 문신을 하듯, 박사도 마찬가지로 자기 나름대로 기록하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메모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의 초반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특이한 고용주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주인공의 아들이 박사와 만나게 되며 작품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박사가 그에게 수학 기호에서 딴 '루트'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고, 둘 다 야구를 좋아했기에 야구선수 카드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 번은 야구장에 박사를 데리고 간 적도 있고, 서로 좋아하는 야구팀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있었지만, 박사의 기억은 사고 이전의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바뀐 구단에 대해 큰 충격을 받는다. 한편 주인공을 고용한 장본인인 박사의 형수는 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겨 고용주의 집에 아들을 데려오고 계약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었다면서 해고하는데, 박사의 말에 마음을 바꾸어 주인공과 루트를 받아들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박사의 모델이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둘 사이에는 우연의 일치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에르되시 팔은 야구를 좋아했다. 유명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이 714회였고, 행크 아론이 715회로 이를 앞지르자 이 두 수를 소인수분해한 뒤 각 소인수를 더하면 그 합이 같다는 점(714=2×3×7×17, 715=5×11×13, 2+3+7+17=5+11+13=29)을 발견해 일명 루스-아론 쌍(Ruth-Aaron pair)을 연구한 적도 있다. 박사가 주인공의 아들을 '루트'라 부른 것도 에르되시와 닮았는데, 그는 평소 단어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엡실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2020/10/23 - [비문학/전기] -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폴 호프만 참고) 에르되시는 항상 수학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특이한 언행을 많이 보였기에 괴짜 수학자의 스테레오타입격인 사람인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이런 사람을 소재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여 주었다.

 책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하면 수학이 가진 소통의 힘이다. 수학에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수학에 소통이 무슨 관련이 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박사, 그의 형수, 주인공, 루트 네 명의 주요 인물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데에는 수학의 영향이 가장 크다. 물론 야구라는 공통의 관심사도 있긴 했으나 박사는 야구를 보면서도 등번호를 가지고 완전수를 설명할 정도로 이 책에서 수학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박사는 주인공을 매일 처음 보듯 대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의 수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전임자들처럼 그만두지 않았고, 더 나아가 루트가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룬 수학적인 지식이 수학 교양서적만 읽어도 나올 정도로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수학을 연구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수학의 힘을 느끼는 데에는 그런 어려운 지식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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